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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물이 핑 도는 순간

hnhnhun 2023. 4. 21. 23:27

나는 한적한 재개발 구역에 살고 있다. 한적하다 못해 아이들의 뛰노는 소리가 들리지 않으면, 적막함이 흐르는 그런 동네에 살고 있다. 동네 사람들은 배달을 시켜 먹지도 않는지, 내가 시킨 배달을 단번에 알아차릴 정도니 한적하다고 말한 게 딱 맞을 거다. 나는 지금 사는 동네에서 젊은 사람에 속한다. 나이를 계속 먹고 있지만, 동네 사람들 모두가 나이를 먹기에 나는 계속 젊은 사람이다. 신촌이나 홍대, 그리고 강남일대에서는 어른 축에 속할 법 한데 말이다.

오늘 재개발과 관련한 정기 총회가 있었다. 총회에서 결정할 사안이 꽤 중요하여 투표를 위해 혹은 그 결과를 알기 위해 많은 이들이 총회장에 모여 있었다. 역시나 그중에서도 내가 가장 어렸다. 변호사가 직업이신듯한 분이 사회자를 봤는데, 사회자가 1.5배속으로 설명을 했더니, 한 어르신은 설명을 계속 들어야 하냐며 불만을 제기했다. 도통 무슨 소리인지 알아들을 수 없다는 신호를 내비쳤다. 사회자의 설명은 젊은 사람이 듣기에도 속도가 빠른 느낌이었고, 어려운 어휘가 난무했다. 나도 그런 설명이 썩 달갑지 않았다. 하지만 난 젊으니까 집중해서 듣다 보니  총회 책자에서 미리 읽었던 내용들이 귀에 들렸다. 그러면서 갑자기 조합원이라고 앉아 계셨던 어르신들은 어떤 생각으로 이 곳에 앉아계실지 궁금해졌다.

설명이 얼추 끝나고 질문을 받는 시간이 되자, 어떤 조합원은 약 5분가량 자신의 어휘력을 뽐내는 듯한 말을 시작으로 본인이 재개발 사업의 집행부가 쓰는 예산이 어떻게 집행되는지 궁금하다며 사업예산의 쓰임에 대해 조합장에게 꼬치꼬치 캐묻기 시작했다. 나도 궁금했던 부분인데, 남이 물어봐주니 잠자코 듣고 있었다.

그런데 선글라스를 낀 여자는 불만이 가득한 복식호흡을 하며 말에 강세를 주는 화법으로 조합원들이 부담해야 하는 돈을 좀 적게 써달라는 민원을 제기했다. 조합장이 사업비로 지출하는 비용을 조합원의 부담으로 지우지 말라고 이 자리에서 당장 대답하고, 사업에 들어가는 돈의 부담을 조합장이 지라며 공격하듯이 따지기 시작했다. 질문자의 태도는 맘에 들지 않았으나, 나도 일부 공감하는 내용이라 일단은 잠자코 보고 있었다.

너도 나도 발언권을 얻고 질문하는 바람에 그렇게 시간이 한 시간가량 흐르니 어르신들은 지루해하셨다. 화가 꽤나 많은 어르신은 호통을 치며 질문좀 그만하라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회의에서 핑퐁처럼 오고 가는 말을 속전속결시키자는 의견을 모으기 시작했다. 그런 원성을 듣다 보니, 나는 젊어서 괜찮았던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선글라스를 낀 여자는 조합장과 핑퐁게임 하듯 말싸움을 이어가는 것도 모자라 자신의 소속을 밝히고 사업이 잘 진행되었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용기를 내 말하는 한 조합원에게 그 조합원이 자신을 오해했다는 이유로 말꼬리를 잡고 따지기 시작했다. 선글라스를 낀 그 여자는 사회자로부터 당신은 '확증 편향'에 사로잡혀있냐는 답변과 이분법적인 사고로 판단하고 말하지 말라는 얘기를 들었다. 그런데도 또 정신을 못 차리고 따지려 들자 나는 그 여자가 무안하도록 한 마디를 던졌다.

"첨언 좀 그만하세요. 왜 이렇게 시끄러워."

젊은 사람의 공격 합세(?)에 자신도 무안해졌는지 정확히 알 수 없으나, 그 말을 들은 뒤에 잠깐 앉아 있다가 손에 꼭 쥐고 있던 투표용지를 투표함에 넣고 조용히 나갔다.

나는 그 순간엔 참 잘했다는 생각을 했었다. 선글라스를 낀 그 여자가 자꾸만 분란을 일으켜 그 사람의 불타오르는 감정의 불씨에 내가 찬물을 끼얹어 줬으니 말이다. 선글라스를 낀 그녀의 자진 퇴장으로 총회의 분위기는 조용해졌고, 본래 진행하는 식순에 맞게 진행을 이어가게 됐다.

그리고는 한 사람씩 빠져나가며 식순이 곧 끝나감을 체감할 때쯤 어떤 할머니께서 나에게 질문을 하셨다.

"끝났어요?"

방금까지 시끄럽고 난장판이었던 이곳에서 그 할머니는 무슨 이유로 앉아계셨던 걸까 궁금했지만, 나는 친절하게 대답했다.

"네."

그리고 할머니는 조용히 나가셨다. 좁아 보였던 총회 장소에 사람들이 듬성듬성 앉아있던 그때, 나도 그곳에서 나오게 되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갑자기 생각에 빠졌다. 나는 젊어서 내용을 알아듣고 있었지만, 노인이신 분들은 그 시간에 누군가의 부탁으로 자리를 채워줬을 수도 있겠구나 싶었다.

조합원으로서 재개발에 드는 비용을 한 푼이라도 더 아끼려는 선글라스를 낀 여자의 태도도 얼추 이해가 가려는 무렵에 식료품점 앞 간이 의자에서 동공이 하얗게 변한 강아지를 품에 꼭 끼고 있는 할머니가 강아지를 번쩍 들어올려서 사랑한다고 말하며 강아지의 복슬복슬한 등에 얼굴을 비비는 모습을 보게 되었다.

그 순간 눈물이 핑 돌았다.

그 할머니뿐 아니라 꽤 많은 수의 어르신들이 옹기종기 살아가고 있는 오래된 동네에 재개발 사업으로 인해 그들의 쉼터를 잃게 된다면 젊은 나는 스스로 다른 곳으로 이사 가서 살면 되겠지만, 동공이 하얗게 변한 강아지와 사는 할머니는 어떻게 되는 걸까 싶었다.

조용하고 나이 든 이 동네를 끔찍하게 싫어했는데, 눈물이 핑 돌면서 이곳에 있는 동안에는 동네를 아낌없이 사랑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어쩌면 난리 치던 선글라스를 낀 여자는 조합장 후보에 출마했던 여자였는데,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도 목소리 높여 주장했겠지만, 갈 곳이 정해지지 못한 많은 수의 어르신들의 입을 대신해서 목청껏 소리친 게 아닌가 싶었다.

그런 사람에게 용기 내 박수를 쳐주지는 못하고 무안을 안겨주어 미안함에 또 눈물이 핑 돌았다.
 

여러모로 눈물이 핑 도는 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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